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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시대 삼대 묵죽화가 작품들

불암솔 2009. 2. 4. 13:23

 

 

 
이정李霆(1541-1626)필 대나무(墨竹圖)
 
1622년. 비단 위에 수묵.

이정(字 仲燮, 號 灘隱)은 세종의 현손이다. 대나무를 잘 그려, 유덕장(柳德章)·신위(申緯)와 더불어 조선시대 삼대 묵죽화가로 꼽힌다. 임진왜란 때 적의 칼에 오른팔을 크게 다쳤으나 이를 극복하고, 회복 후에는 더욱 힘찬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작품은 비가 내려 촉촉이 젖어 있는 대나무를 표현한 우죽(雨竹)으로, 속세의 티를 씻어낸 맑은 대나무의 이미지를 잘 드러낸다. 오른쪽 아랫부분에 "천계 임술년 봄에 탄은이 월선정에서 그렸다(天啓壬戌春灘隱寫干月先亭)’라는 관지(款識: 작가의 이름과 함께 그린 장소나 일시, 누구를 위하여 그렸는지 등을 기록한 것)와 도장이 있다.

 
유덕장필묵죽도(柳德章筆墨竹圖)


조선(朝鮮)
지(紙)
세로 : 178Cm / 가로 : 77.4Cm / 축길이 : 83.6Cm
일반회화(一般繪畵)
동원이홍근수집명품선-회화편, 한국고미술연구소, 1997, 도55
국립중앙박물관
동원(東垣) 2626
 
유덕장(柳德章) [자(字) 자고(子固), 호(號) 수은(峀雲)·가산(茄山)]은 조선후기의 묵죽화가로서 벼슬은 종2품인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그는 조선중기의 이정(李霆)과 후기의 신위(申緯)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꼽히고 있다.
 
우상부에 황강노절(黃岡老節)이라 묵서한 그의 통죽도를 이정의 통죽도와 비교하여보면 줄기의 배치나 잎사귀의 위치가 유사하여, 그가 이정의 묵죽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유덕장의 왼쪽 대나무 줄기가 둥글게 꺾였으며 이정의 댓잎이 탄력성있고 유연하다면 유덕장의 것은 딱딱하고 날카로롸진 변화를 보인다.
 
 또한 대나무 줄기의 묵색이 의도적으로 진해지고 이정의 호형(弧形) 마디가 보다 직선화 되어 자연스러움이 덜하다. 토파 표현도 변하여 절파의 잔영은 보이지 않고 단순한 윤곽에 대소의 세로점이 짝을 지어 찍혔다. 이처럼 유덕장의 묵죽화는 이정의 양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이정의 작품이 갖고 있는 여유로움과 생동감보다는 강인하고 견고한 분위기가 강조되어 있다
 
 
 
묵죽도(墨竹圖) (신위)
가로 39.0cm. 세로 168.0cm.
족자. 종이에 수묵.
신위의 자는 한수(漢未). 호는 자하(紫霞), 관은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그의 묵죽화 기법은 강세황에게 사사한 것이다. 이 쌍폭 족자는 중국산 화문장지에 상.화단으로 나누어 그린 신위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하단에는 바위 아래의 세죽(細竹)을 , 그리고 상단에는 농묵과 담묵으로 양죽과 음죽을 표현하였다.
Shin Wi(1769-1845). Bamboos in Ink.
 
묵죽도(墨竹圖)

신위는 평산인(平山人)으로 자는 한수(漢搜), 호는 자하(紫霞), 당호(堂號)는 경수당(警修堂)이다. 1799년 문과에 급제한 후 그는 1812년에 연경(燕京)에 갔었다. 강세황(姜世晃)으로부터는 묵죽화법을 배웠으며, 김정희(金正喜), 그리고 청(淸)의 옹방강(翁方綱) 등 국내외의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며 시서화 삼절(詩書畵 三絶)로 이름이 높아졌다.
조선시대 중기의 이정(李霆), 후기의 유덕장(柳德章)과 함께 삼대 묵죽화가로 꼽히며, 그의 화풍은 아들 명준(命準), 명연(命衍)을 비롯해 조희룡(趙熙龍)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글씨는 동기창체(董其昌體)를 따랐고, 이 서체의 유행에 계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저서로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와 {자하시집(紫霞詩集)}이 전하고 있다.
군자(君子)의 인품에 비유된 대나무는 문인사대부의 이상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소재여서 많이 그려졌다.
날카롭고 속도감이 있는 필선으로 힘차게 그렸던 조선중기 이정(李霆 1541- ?)의 묵죽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화가 개개인의 성품을 반영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양식으로 발달하였는데, 그 중 자하의 묵죽은 선비의 내면세계를 표출하듯 부드럽고 온화한 화풍을 보인다.
이 그림은 전형적인 죽석도(竹石圖)로 커다란 바위를 중심으로 자라는 몇 그루의 대나무를 묘사한 것이다. 부드러운 담묵(淡墨)을 주조(主調)로 한 바위에는 몇 군데 농묵(濃墨)의 미점(米点)으로 강조하였고, 대나무 잎 역시 농묵과 담묵의 대조로 화면에 변화와 활기를 불어넣도록 하였다.
화면 상단 오른쪽에 '자하산초(紫霞山樵)'라는 관서(款署)가 있으며 '자하(紫霞)', '소재묵연(蘇齋墨緣)'의 주문방인이 있다. 그리고 하단에는 '후학석운박기양감정(後學石雲朴箕陽鑒正)'이라는 글과 '박기양인(朴箕陽印)'의 백문방인이 있다.
紫霞山樵 後學石雲朴箕陽鑒正
자하산 나무꾼. 후학인 석운 박기양은 감정하다.
묵죽도 (墨竹圖)

신위의 대나무 그림은 품격이 있으면서도 우아한 점이 특징이다.
강인한 대나무의 모습보다는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올라 펼쳐지는 방식을 취하고, 댓잎은 길고 유연하게 뻗쳐 올라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묵죽〉은 이러한 유연함에 짝하여 절벽의 바위를 함께 그려 죽석도(竹石圖)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먹의 농담에 변화를 주어 원근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나 원근감보다는 평면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무성하게 중첩된 댓잎이 신위의 대나무가 지닌 멋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종이에 수묵
160.2cm x 46.9cm
고려대 박물관
신위(申緯)
신위(1769-1847)는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한수, 호는 자하(紫霞), 경수당(警修堂)이다. 당시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나 1799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다. 1812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 중국의 학문과 문학을 실지로 보고 안목을 넓혔는데, 특히 중국의 학자 옹방강(翁方綱)과의 교류는 그의 학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그림, 글씨, 시로써 많은 업적을 남겼다. 시에서는 한국적인 특징을 찾으려고 노력하여 없어져가는 악부(樂府)를 보존하였고, 글씨에 있어서는 명나라 동기창의 서체를 따라 이 서체가 유행하게 하는 데 계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림은 산수와 함께 묵죽에 능하였다. 강세황에게 묵죽을 배웠다고 하는데, 이정(李霆), 유덕장 등과 함께 우리 나라 삼대 묵죽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묵죽화풍은 아들 명준(命準), 명연(命衍) 등에게로 이어졌으며, 저서로는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와 《자하시집(紫霞詩集)》이 전한다.
 
 
묵죽도(墨竹圖)

신위는 평산인(平山人)으로 자는 한수(漢搜), 호는 자하(紫霞), 당호(堂號)는 경수당(警修堂)이다. 1799년 문과에 급제한 후 그는 1812년에 연경(燕京)에 갔었다. 강세황(姜世晃)으로부터는 묵죽화법을 배웠으며, 김정희(金正喜), 그리고 청(淸)의 옹방강(翁方綱) 등 국내외의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며 시서화 삼절(詩書畵 三絶)로 이름이 높아졌다.
조선시대 중기의 이정(李霆), 후기의 유덕장(柳德章)과 함께 삼대 묵죽화가로 꼽히며, 그의 화풍은 아들 명준(命準), 명연(命衍)을 비롯해 조희룡(趙熙龍)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글씨는 동기창체(董其昌體)를 따랐고, 이 서체의 유행에 계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저서로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와 {자하시집(紫霞詩集)}이 전하고 있다.
군자(君子)의 인품에 비유된 대나무는 문인사대부의 이상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소재여서 많이 그려졌다.
날카롭고 속도감이 있는 필선으로 힘차게 그렸던 조선중기 이정(李霆 1541- ?)의 묵죽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화가 개개인의 성품을 반영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양식으로 발달하였는데, 그 중 자하의 묵죽은 선비의 내면세계를 표출하듯 부드럽고 온화한 화풍을 보인다.
이 그림은 전형적인 죽석도(竹石圖)로 커다란 바위를 중심으로 자라는 몇 그루의 대나무를 묘사한 것이다. 부드러운 담묵(淡墨)을 주조(主調)로 한 바위에는 몇 군데 농묵(濃墨)의 미점(米点)으로 강조하였고, 대나무 잎 역시 농묵과 담묵의 대조로 화면에 변화와 활기를 불어넣도록 하였다.
화면 상단 오른쪽에 '자하산초(紫霞山樵)'라는 관서(款署)가 있으며 '자하(紫霞)', '소재묵연(蘇齋墨緣)'의 주문방인이 있다. 그리고 하단에는 '후학석운박기양감정(後學石雲朴箕陽鑒正)'이라는 글과 '박기양인(朴箕陽印)'의 백문방인이 있다.
紫霞山樵 後學石雲朴箕陽鑒正
자하산 나무꾼. 후학인 석운 박기양은 감정하다.

출처 : 고목나무 뜨락
글쓴이 : 고목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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