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 |
![]() | 금태조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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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조 아골타 | |
중원에서 최초로 한족을 밀어낸 금태조 아골타, 그의 시조는 놀랍게도 신라인 함보였다. 이것은 전설이나 야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와 금 건국 시 송나라에서 씌어진 <송막기문>에 명확히 나오고 있다. ※ 아구다 (阿骨打(아골타) ; 1068~1123) 중국 정복왕조인 금(金)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1115∼1123)로서 성은 완옌[完顔]이며 묘호는 태조(太祖)이다. 그리고 이름은 민(旻)이며 아르추카수[按出虎水] 완옌 부족의 수장(首長) 핵리발(劾里鉢: 世祖)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나란[拏懶]씨 출신이다. 아버지, 숙부인 영가(盈歌: 穆宗) 및 형 오아속(烏雅束: 康宗)을 도와서 완옌부의 세력확대에 큰 공을 세웠다. 아구다의 아버지가 1100년 반란을 계획했지만 그는 그해에 죽었다. 1112년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 (天祚帝 ; 1075~1125)가 여진족의 땅에 와서 부족장 아구다에게 자신을 위해 춤추라고 명령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1113년 오아속의 뒤를 이어 수장이 되었을 때 완옌부는 동부 만주의 생여진(生女眞)과 고려의 장성(長城) 밖 여진 제부(諸部)의 통합에 성공하였다. 요(遼)나라의 혹심한 주구(誅求)에 시달린 여진인들의 쌓인 불만을 이용하여, 1114년 그는 군사를 일으켜 요군을 만주 동부의 영강주(寧江州)에서 격파하고 그 부근의 여러 주(州)를 함락시킨 뒤, 이듬해 황제위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한편, 아구다는 맹안모극제(猛安謀克制)라는 행정제도를 1114년 정비하였다. 이것은 300호(戶)를 1모극부(謀克部)로 하고 10모극부를 1맹안부(猛安部)로 하였으며 모극부의 장(長)인 모극과 맹안부의 장인 맹안은 세습제였다. 군사제도로서는 1모극부에서 100명의 병사를 징집하여 1모극군(軍)을 편성하고 10모극군을 1맹안군으로 편성하여 그 장은 각각 모극과 맹안이 맡았다. 평화시에는 생업에 종사하게 하고 전시에는 병사로 동원했다. 그후 약체화한 요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요동(遼東)에 진출, 중국 북동부의 연운(燕雲) 16주의 수복을 꾀하기 위해 송(宋)나라와 동맹하였다. 이어 요나라를 협공, 1121년 말부터 요나라 중경(中京: 네이멍구자치구 寧城縣大名城)을 점령하고, 다시 서경(西京)을 함락시켰다. 1122년 그의 친정(親征)으로 연경(燕京: 北京)을 함락시키는 등 요나라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연경 및 그 주변 땅을 송나라에 줄 것을 승낙하고 연경으로부터 철수하였다. 1123년 병에 걸려 본거지 회령부(會寧府: 黑龍江省 阿城)로 돌아오다가 객사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제2대 태종(太宗:재위 1123∼1135) 때에는 1125년 요를 멸망시키고 서하(西夏) ·고려(高麗)를 복속시켰다. | |
“금시조의 이름은 함보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온 신분이다” (금사본기 제 1권, 세기)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이고 완안씨는 중국말 왕과 같다”(송막기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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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 | 송막기문 |
고려에서 온 신분이며 신라인인 금시조. 아골타의 출생년도를 고려해 계산해보면 금 시조 함보가 여진에 들어온 시기는 신라 말, 고려 초다. 당시 신라와 고려의 왕권교체기였던 한반도의 사정을 생각하면 두 사서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아골타의 조상 함보, 그는 과연 누구일까? |
![]() | 함보, 그는 누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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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황실 계보도 |
<동명해사록>에 함보의 9대손 아골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
김부(경순왕敬順王)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김부의 외손 완안아골타는 곧 권행의 후예로서 능히 중국을 갈라 다스려 백년동안 대를 이었으니... (동명해사록 1636년) |
조선의 유학자 김세렴은 여진족의 아골타를 경순왕의 외손이며 조선최고가문 권행의 후예라고 하고 있다.그런데 권행의 본래 성은 金(김)씨였다.김행의 아들이며 경순왕의 외손인 금의 시조. 당시 족내혼을 했던 신라 왕실의 관습을 고려하면,그의 성이 金(덧말:김)이며 신라의 후예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동명해사록>의 금 시조와 <금사>의 함보는 과연 동일인인가? |
![]() | 신라 후예인 왕족과 발해 후손의 왕비족이 세운 나라, 금 |
함보를 시조로 둔 금 황실은 발해인을 왕비로 맞는다. 금나라의 성군 세종의 어머니,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는 모두 발해 여인이었다. 또한 아골타는 발해인을 신뢰하여 발해유민 장호를 새로운 수도 북경 건설 책임자로 등용한다. 발해는 대제국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었다.금나라는 이런 발해의 경험을 이용하여 국가체제를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
![]() | 청 황실의 성씨도 김씨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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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태조 누루하치 |
금 멸망 후 1606년, 여진은 다시 중원을 장악했다. 바로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이다. 그런데 청나라 황제 성은 아이신 줘러 였다. 아이신(愛新)이란 금(金), 줘러(覺羅)란 겨레(族)부족 씨 등을 뜻한다. 결국 금 부족, 김씨들 이라는 뜻이다.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 그의 후예인 금 황실, 청 황실까지 그들은 모두 금을 뜻하는 김(金)씨들이었던 것이다. |
![]() | 만주역사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 청나라로 이어지는 만주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한족의 영토,중원을 만주대륙에 합병하여 오늘의 중국을 완성한 여진족, 그들 선조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우월감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반역사적인 동북공정 논리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우리 역사를 지켜내어 향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
♨ 여진족 (女眞族) :
동부 만주(滿洲)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이 민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한(漢)나라 때는 읍루(?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隋) ·당(唐)나라 때는 말갈(靺鞨)로 불리었다.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나라 때는 만주족(1635년, 청의 2대황제 '홍타이지'가 공식적으로 여진족을 만주족이라고 개명)이라고 불렀다.
♨ 여진족이 세운 나라 : 1115년 금(金)나라, 1616년 후금(1636년 청淸으로 개명) 건국
♨ 한반도와 여진족의 관계
- 여진족이 한국과 관계를 가진 것은 발해(渤海)가 멸망한 뒤 이들이 그 고토(故土)에 준거한 고려 초기부터이다. 여진족 중에서도 고려와 관계를 가진 것은 고려의 북서부에 있던 압록강 유역 양안(兩岸)의 서여진[西蕃]과 동북의 함경도 지방 일대에 걸쳐 거주한 동여진[東蕃]인데, 고려가 이들 두 곳의 여진과 직접적으로 교섭한 것은 왕건의 북방개척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초기에 여진은 고려를 상국으로 섬겼고, 고려는 이를 회유하여 무역을 허락하고 귀화인(歸化人)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살게 하였다. 당시 여진인은 활 ·말 ·화살 ·모피 등 전쟁 도구를 조공(朝貢)하고, 의료 ·식량 ·농기구 ·그릇 등 생활필수품을 주로 수입해 갔다.
이와 같은 고려의 회유정책에 의하여 여진과의 관계는 평온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숙종(肅宗) 때 하얼빈[哈爾濱]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完顔部]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 북간도(北間島) 지방을 장악한 뒤 두만강까지 진출하였다. 1104년(숙종 9) 영가의 뒤를 이은 조카 우야슈[烏雅束]는 더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한 여진부락을 경략하였다. 이때 고려에 복속한 여진인으로 완옌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무리가 있어 우야슈는 이들을 추격, 함경도 정평(定平)의 장성(長城) 부근까지 진출하여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고려에서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보내어 우야슈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추밀원사 윤관(尹瓘)을 보내 겨우 화맹(和盟)을 맺었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패전으로 정평 ·장성 외의 여진부락은 완옌부의 치하에 들어갔다. 윤관은 숙종에게 패전의 원인을 보고하면서 기병(騎兵)의 양성, 군량(軍糧)의 비축 등을 건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신기군(神騎軍:騎兵) ·신보군(神步軍:보병) ·항마군(降魔軍:승려부대)으로 이루어진 별무반(別武班)을 편성, 특별부대로 훈련시켰다.
1107년(예종 2) 고려는 윤관을 도원수(都元帥)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여 군사 17만을 동원, 함흥평야 일대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청(北靑)까지 진출하여 함주(咸州)를 중심으로 9성(九城)을 쌓았다. 또한 남방의 민호(民戶)를 옮겨 9성에 이주시켰으며, 특히 길주성(吉州城) 안에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와 진국보제사(鎭國普濟寺)를 창건하고 개경으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9성을 쌓은 뒤 이의 방어 자체도 어려웠고 또 여진족이 9성을 돌려달라고 애원하여 9성을 쌓은 지 만 1년 만에 여진족에게 돌려 주었다. 그 뒤 아구다[阿骨打]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1115년 국호를 금(金)이라 칭하고, 1117년 고려에 형제관계를 요구하여 왔고, 1125년 요(遼)를 멸망시킨 뒤에는 고려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송나라와의 교류에도 간섭하였다. 당시 집권자 이자겸(李資謙)과 경주파 문신(文臣)은 금나라와 타협함으로써 이후 고려의 북방개척정책은 일시 좌절되었다. 1234년 금나라가 몽고에 멸망하자 여진족은 만주지방에서 부족단위로 할거하였고, 원(元) ·명(明) 교체 이후에는 압록강 ·두만강 연안에서 빈번히 소란을 피웠다.
고려를 이은 조선 초기의 대여진정책은 회유와 무력의 양면정책을 썼다. 회유정책으로는 귀순을 장려하여 관직 ·토지 ·주택을 주어 귀순자를 우대하였다. 1406년(태종 6)에는 함경도 경성(鏡城)과 경원(鏡源)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조공무역(朝貢貿易) 및 국경무역을 허락하였으며, 한양에는 이들의 사신(使臣)을 접대하는 북평관(北平館)까지 설치하였다. 당시 여진은 말 ·모피 등의 토산물을 바치고, 식량 ·의복재료 ·농기구 ·종이 등을 교환해 갔다. 한편, 무력정책으로는 국경지방에 진보(鎭堡)를 설치하여 전략촌으로 바꾸어 방비를 강화하였고, 복속하지 않는 여진족의 본거지를 토벌하였다.
태조는 경원에 성보(城堡)와 주(州) ·군(郡)과 역참(驛站)을 두었다. 1403년(태종 3)에는 강계부(江界府), 1414년에는 여연군(閭延郡)을 두어 여진의 준동에 대처하였다. 세종은 4군(郡) ·6진(鎭)을 개척하여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연안선을 확보하고 여기에 삼남(三南) 사람을 이주시켰다. 세조 때는 남이(南怡) ·어유소(魚有沼) 등이 압록강변의 여진을 토벌[丁亥西征]하였고, 신숙주(申叔舟)는 회령(會寧) 부근의 여진을 축출하고 모련위(毛憐衛) 여진족의 근거지를 토벌[庚辰北征]한 뒤 하삼도(下三道) 백성 l만을 이주시켰다.
1479년(성종 10)에는 서북 방면의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이 침입하여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이 이를 격퇴하였고, 1491년에는 동북 방면의 여진추장 우디거[兀狄哈] 부족이 회령의 조산보(造山堡)에 침입하여 도원수 허종(許琮)이 이를 물리치는 등 여진족은 조선의 북변에서 크고 작은 소란을 피웠다. 그 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국력이 차차 쇠약해지자 이 틈을 타 여진족은 세력을 확장해 나가다가, 1616년(광해군 8) 여진의 추장 누루하치[奴兒哈赤]가 흥경(興京)에서 후금(後金)을 세우고 1627년(인조 5)에는 정묘호란, 1636년에는 병자호란으로써 조선을 정복, 그 뒤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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